비가 내리고 있었다. 압구정의 밤거리는 젖은 아스팔트 위로 네온이 번지고, 유리 건물들이 서로를 비추며 일렁였다. 한도윤은 블랙 카에서 내리며 코트 깃을 세웠다. 비에 젖은 울 코트에서 젖은 양모의 묵직한 냄새가 올라왔다. 프라이빗 클럽의 입구는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철제 문 하나뿐이었다. 보안 요원이 그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안쪽 복도는 어두웠고, 바닥의 두꺼운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다. 저음의 베이스가 벽과 바닥을 통해 맥동하듯 전해져 왔다. 심장 박동처럼, 그러나 더 느리고 끈질기게.
한도윤은 프라이빗 라운지로 안내되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긴 문. 바깥 세계와의 단절. 라운지는 넓었으나 조명은 낮았다. 가죽 소파와 벤치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베이스의 진동이 가죽 표면을 미세하게 떨리게 했다. 공기 중에는 숙성된 위스키의 짙은 향이 떠다녔다. 오크 배럴과 바닐라, 그리고 약간의 연기. 그 위로 비에 젖은 코트들의 냄새가 섞였다.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방금 전까지 달아올랐던 볼과 목덜미가 그 차가운 기운에 움찔했다. 통창 너머로 압구정의 도시 불빛이 반짝였다. 한강 쪽의 고층 빌딩들, 그리고 그 아래 흐르는 차들의 불빛이 유리에 비쳐 일렁였다.
강시현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창가 쪽 소파에 앉아 위스키 잔을 돌리고 있었다. 정장 재킷은 벗어 던진 채,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넥타이 매듭은 조금 풀려 있었다. 한도윤이 들어섰을 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단지 잔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대며 말했다.
“늦었군요, 한도윤 씨. 기자회견 후 수습하느라 바빴나 보죠.”
한도윤은 코트를 벗어 옆에 던지고 맞은편에 앉았다. 가죽 소파가 그의 무게를 받아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베이스의 저음이 허벅지를 통해 올라왔다. “수습할 건 당신 쪽이지. 10년 전 거래를 공개 석상에서 꺼내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당신 가문 자료도 이미 준비되어 있어.”
강시현이 드디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그의 눈가를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온 거요? 협박하러? 아니면… 진짜 대화를 하러?”
“진짜 대화.” 한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청담 프로젝트. 공개적으로는 서로를 물어뜯었지만, 여기서는 재협상한다. 조건은 명확해야 해. 주민 이주 보상 비율, 안전 관리 감독권, 그리고 자금 출처 공개 범위. 한 치도 양보 없다.”
강시현이 웃었다. 낮고, 건조한 웃음. “양보 없다. 그 말,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강디벨롭먼트는 이미 주민 대표 일부를 설득했다. 강제 수용이 아니라 ‘자발적’ 합의 형태로 포장할 수 있어. 당신네 한바이오의 불투명한 해외 자금줄을 문제 삼으면 주민들도 등을 돌릴 거고. 우리는 포식자가 아니라 ‘효율적 개발자’로 남을 수 있지.”
한도윤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의 위스키 잔을 움켜쥐었다. 유리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효율? 당신들이 말하는 효율은 사람을 숫자로 환원하는 거다. 부실 공사 위험은 어떻게 할 건가. 은폐된 비리. 주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그 부분. 가문의 충성 테스트는 이미 시작됐어. 서로를 파멸시키라는 명령.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프로젝트 조건을 양보할 생각이 없나 보군.”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강시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셔츠 칼라 사이로 목덜미의 곡선이 드러났다. 맥박이 뛰는 자리. 한도윤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었다. 기자회견 때와 똑같이. “한도윤. 당신 가문의 과거를 파헤친 건 나만이 아냐. 당신도 내 그림자를 이미 다 알고 있어. 2014년 압구정 강제 수용. 아버지 서명. 내 명의 상가. 그걸 공개하면 나도 끝장이지.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 앉아 있어. 왜일까?”
공기가 무거워졌다. 에어컨의 서늘함이 달아오른 피부를 물었다. 한도윤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과 스모키가 혀를 감쌌다. “파멸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누가 먼저 누구를 무너뜨릴지.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강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누구를 먼저 파멸시키나. 흥미로운 질문이지. 당신이 내 목을 볼 때, 무엇을 생각하나? 기자회견에서처럼. 그 시선. 입술을 볼 때. 그리고 지금, 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한도윤의 속이 타올랐다. 적대. 욕망. 구분되지 않는 불길. “나는 당신의 약점을 계산한다. 목의 맥박. 목소리의 떨림. 당신이 나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나도 그만큼 당신을 파고들었다. 프로젝트 조건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거다. 주민 참여 보장, 재정 투명성. 당신네 방식이 포식이라는 걸 입증할 자료는 이미 충분해.”
“자료.” 강시현이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가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자료로 서로를 죽이는 건 낮의 일이다. 밤은 다르다. 이 클럽의 잠긴 문 안에서는 정장 갑옷이 벗겨지지. 한도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키려 하면서도, 내 앞에 서면 손이 떨린다. 아니, 심장이.”
한도윤이 일어섰다. 가죽 소파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베이스의 진동과 섞였다. “떨리는 건 당신이다. 가문의 명령 앞에서 주저하는 건 당신 쪽이지. 청담 프로젝트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 가문의 모든 비리를 공개할 거다. 주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그 은폐. 그걸로 당신은 끝장이다.”
강시현도 일어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통창 너머 압구정의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끝장? 당신도 마찬가지야. 10년 전 거래. 내부 정보. 한바이오 초기 자금. 그걸 터뜨리면 당신 가문도 무너진다. 누가 먼저인가. 누가 누구를 먼저 파멸시키나. 그 게임을 여기서, 지금, 재협상하자는 거지.”
한도윤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강시현의 셔츠 칼라를 움켜쥐었다. 주먹이 옷깃을 비틀며 그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다른 손은 본능적으로 뒤로 뻗어 스모크드 글라스 벽에 닿았다. 유리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이 달아오른 목덜미를 스쳤다. “당신은… 내 앞에 서 있는 순간부터 가장 위험한 변수다. 강시현.”
강시현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의 손이 한도윤의 손목을 움켜쥐었으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끌어당기듯. “그리고 당신도. 한도윤.”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분노와 욕망이 뒤섞인, 낮고 거친 소리.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그 소리.
말이 끊겼다. 누가 먼저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세차고, 뜨겁고, 서로를 삼키려는 듯한 입맞춤. 스모크드 글라스 벽에 등이 밀리며 한도윤의 손이 더 세게 유리를 눌렀다. 떨리는 손가락. 비틀린 셔츠 칼라. 강시현의 낮은 신음이 입 사이로 새어 나왔다. 분노와 갈망이 뒤엉킨 그 소리. 베이스의 저음이 발밑에서 울리고, 위스키의 향이 숨결에 섞였다. 비에 젖은 코트 냄새가 공기 중에 남아 있었고, 에어컨의 차가움이 달아오른 피부를 물어뜯었다. 통창 너머 압구정의 불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유리에 길게 늘어뜨렸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러나 곧 둘은 서로를 밀쳐내듯 떨어졌다. 입술이 떨어지고, 숨이 거칠게 오갔다. 한도윤의 주먹은 여전히 셔츠 칼라에 감겨 있었고, 다른 손은 유리에 붙어 떨리고 있었다. 강시현의 눈은 어두웠다. 분노와 욕망, 그리고 이미 대가를 계산하는 듯한 냉정함이 그 속에 공존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입술에 남은 열기, 목덜미의 맥박, 손끝의 떨림. 이미 계산되고 있었다. 이 순간의 비용. 가문의 명령. 프로젝트의 조건. 주민의 위험. 그리고 서로를 파멸시키라는 테스트 속에서 피어난, 돌이킬 수 없는 집착.
강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아직 낮고 거칠었다.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한 치도. 그러나 이 밤의 일은… 서로의 목에 걸린 칼이 된다.”
한도윤은 손을 천천히 풀었다. 셔츠 칼라가 구겨진 채 남았다. “칼은 이미 뽑혀 있어. 청담의 칼날처럼. 누가 먼저 찌를지, 그건 내일 결정된다.”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위스키 잔을 다시 집어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압구정의 불빛이 반짝였다. 베이스는 여전히 맥동했고, 에어컨은 차갑게 불었으며, 가죽 소파에는 그들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조용히 들어와 잔을 치우고 나갔다. 단 한 명의 직원. 그의 시선이 스모크드 글라스 벽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문은 다시 잠겼다.
한도윤은 그 밤을 기억했다. 입술의 열기. 손의 떨림. 강시현의 낮은 소리. 그리고 계산된 시선. 가문의 충성 테스트와 윤리적 딜레마 사이에서,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한 발 더 다가섰다. 파멸의 계약. 욕망의 계약.
다음 날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전국의 헤드라인이 폭발했다. “청담 재개발 라이벌, 압구정 프라이빗 클럽에서 은밀한 입맞춤 포착.” 유출된 영상이 순식간에 퍼졌다. 스모크드 글라스 벽에 밀린 두 사람의 실루엣. 비틀린 셔츠. 맞닿은 입술. 단 한 명의 직원이 남긴 그 영상. 한바이오와 강디벨롭먼트의 주가가 동시에 폭락했다. 거래량이 폭증하고, 증권 방송이 긴급 속보를 내보냈다.
한도윤의 휴대전화가 미친 듯이 울렸다. 강시현의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화면에는 동일한 내용의 가문 소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즉시 본가로. 충성 테스트의 다음 단계. 설명하라.”
한도윤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서울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에는 아직 어젯밤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강시현의 목덜미. 그 낮은 소리. 그리고 서로를 파멸시키라는 명령 아래에서 타오르는, 돌이킬 수 없는 욕망. 청담의 칼날은 이제 그들의 목을 동시에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이미 서로의 살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